2025.06.18 - [심리학 공부/칼 구스타프 융] -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1) : 내 안의 이성성, 그 심리적 의미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1) : 내 안의 이성성, 그 심리적 의미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강하게 끌리거나,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이 드는 경우가 있다.분명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했고,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는데도마음 깊은 곳
awelcomerain.tistory.com
2025.06.20 - [심리학 공부/칼 구스타프 융] -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2) : 반복되는 연애의 심리 구조, 이별 후에도 같은 연애를 반복하는 당신에게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2) : 반복되는 연애의 심리 구조, 이별 후에도 같은 연애를 반복
2025.06.18 - [심리학 공부/칼 구스타프 융] -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1) : 내 안의 이성성, 그 심리적 의미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1) : 내 안의 이성성, 그 심리적 의미어떤 사람을 처
awelcomerain.tistory.com
그 사랑은 처음엔 정말 좋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열리고, 이해받는다고 느꼈던 건 처음이었다.
마치 나를 구해줄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 사람 앞에선 나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점점, 말이 줄고 마음은 멀어지고 나는 자꾸만 불안해졌다.
사소한 말에 상처받고, 눈치를 보게 되고,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를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사랑이 끝나기 전부터 나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끝난 사랑이 이상하게도 더 오랫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슬픔을 넘어서, 나는 점점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다.
“왜 나는 또 이런 사랑을 했을까?”
“왜 나는 나를 무너뜨리는 사람을 자꾸 사랑하게 될까?”
이 글은 그 질문의 답을
무의식 속에 잠든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아니마/아니무스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사랑 속에 숨어 있는 무의식의 투사,
그 투사가 깨지는 순간 찾아오는 자기혐오와 고독,
그리고 그 감정이 나를 어떻게 다시 만나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심리적인 깊이와 답을 찾아가려는 여정이다.
아니마 / 아니무스 (anima / animus)
모든 인간은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모두 분비된다는 생물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태도나 감정 등의 심리학적 의미에서도 각각 이성(異性)의 성질을 갖고 있다.
아니마는 남성의 무의식 속 여성성,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 속 남성성을 뜻한다.
융은 인간의 심리에 양성성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고,
이 반대 성향의 무의식적 이미지가 자아와 무의식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아니마/아니무스를 통해 꿈을 꾸고, 사랑에 빠지고, 예술과 직관을 경험한다.
연인이나 이성에게 강하게 끌릴 때,
그것은 내 무의식 속 이미지가 그 사람에게 투사된 결과일 수도 있다.
남자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 여성과 접촉함으로써 아니마 원형을 발달시켰고,
여성 역시 남성과 접촉함으로써 아니무스 원형을 발달시켰다.
여러 세대를 걸쳐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이성에게 적절히 반응하고
이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남녀의 여러 특징을 획득한 것이다.
따라서 아니마와 아니무스 원형은 페르소나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큰 가치가 있다.
"모든 남자는 자기 속에 영원한 여성상을 갖고 있다.
그것은 특정 여성의 이미지가 아니라 명확히 여성화 된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무의식적이고,
남성의 살아 있는 유기 조직에 새겨져 있는 원시적 기원의 유전적 요소이다.
이 이미지는 무의식적이므로 항상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투사되고,
정열적인 매력이나 혐오를 느끼게 하는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융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자는 여성상을 유전으로 물려받아서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기준을 만들고 그에 큰 영향을 받아
특정한 여자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마의 맨 처음 투사는 항상 어머니에게 행해지고,
마찬가지로 아니무스의 최초 투사는 아버지에게 행해진다.
후에 남자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여자에게 아니마를 투사한다.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늘 눈부시다.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나의 결핍이 메워지는 듯한 충만함을 느낀다.
하지만 융 심리학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꼭 '그 사람'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 저장된 아니마/아니무스의 이미지를 그 사람에게 투사한다.
이상적인 이성상, 잃어버린 감정, 어린 시절의 기억, 상처…
이 모든 무의식적 감정들이 덧씌워져서 우리는 '환상의 사랑'을 경험한다.
지금 사랑의 문제가 '상대방' 때문이라고 느끼는 이유
연애가 힘들어질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이 나를 이해하지 못해.”
“처음과 너무 달라졌어.”
“속은 느낌이야.”
하지만 정말로 상대가 '변한 것'일까?
융 심리학은 이 질문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다.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질 때,
그 감정은 대부분 내 무의식에 있던 아니마/아니무스 이미지가 상대에게 투사되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사랑한 것은 상대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내가 무의식 속에 만들어 둔 이성상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현실의 상대와 이상화된 이미지 사이에 틈이 생기면,
우리는 혼란스럽다. 그때 우리는 "상대가 변했다"고 느끼지,
내가 덧씌운 이미지가 사라졌다고는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투사를 회수하지 못하고, 감정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이유다.
왜 우리는 환상이 깨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까?
투사는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투사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나오는 강력한 감정과 상(象)이 외부 대상에 덧씌워진 상태다.
내 안의 아니마/아니무스는 정서적으로 너무 익숙하고, 오래된 심상이기 때문에,
그것이 투사되면 실제보다 더 강한 실재감을 가진다.
그래서 상대는 현실의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오래된 이미지의 현실화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사랑이 어느 순간부터 힘들어질 때, 우리는 상대방이 변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내가 덧씌운 이미지가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어릴 때, 늘 바쁘고 자기감정 표현에 인색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녀는 “언젠가는 나를 정말로 봐주고, 깊이 이해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강한 바람을 갖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하고 말이 적지만 눈빛이 깊은 남자를 만났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을 뿐인데,
그녀는 “이 사람은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야” 라고 느꼈다.
그건 사실 그녀가 원했던 감정—어릴 적 충족되지 않았던 욕구—를 무의식적으로 그 남자에게 투사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무뚝뚝했을 뿐, 그녀를 정말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충격을 받는다. “왜 이렇게 변했지?”
그는 변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녀가 본 건 ‘자신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 우리는 왜 자신을 탓하게 되는가?
사랑이 깨지면 사람은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반응하게 된다.
- 상대가 나빴다, 변했다, 실망했다 –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
- 내가 부족했다,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 자기혐오
이 두 가지는 모두 무의식의 투사가 걷힐 때 생기는 ‘혼란’의 결과이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자기혐오는 특히 과거의 상처가 깊은 사람들에게 더 자주 일어난다.
내 환상이 깨졌다는 걸 인정하는 것은 ‘자기 상실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아니마/아니무스 이미지에는 단지 상대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 욕망, 상처, 기대, 구원에 대한 판타지가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그것이 깨졌다는 걸 인정한다는 건,
내가 의지하고 있던 심리적 구조 하나가 무너지는 것 같은 감정을 동반한다.
"내가 틀렸구나."
"그건 사랑이 아니었구나."
"그 사람은 사실 아무것도 구해주지 못했구나."
이건 단지 실망을 넘어서 정체성 자체의 흔들림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를 방어기제로 부인(denial)하거나 외부에 탓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 민지는 항상 자신보다 똑똑하고 세련된 사람에게 끌렸다.
그녀는 그 사람을 보면 “멋지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저런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까?” 하는 불안이 섞여 있었다.
어느 날 그런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는 민지를 좋아하는 듯 보였다.
처음엔 “나도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자존감의 회복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그는 점점 그녀를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민지의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자책이었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
“내가 더 예뻤다면, 내가 더 말 잘했더라면…”
“나는 항상 사랑받기엔 뭔가가 부족한 사람인가 봐…”
이건 단순한 슬픔이나 상처가 아니다.
그녀의 무의식 안에는 오래전부터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이미지를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극복해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실패했을 때, 그녀는 더 깊은 자기혐오의 웅덩이로 빠진 것이다.
상처를 받았음에도 우리는 왜 같은 연애 패턴을 반복할까?
1. 무의식의 ‘보상 욕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융은 반복되는 패턴을 단순한 습관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무의식의 보상(compensation) 기제로 설명했다.
"무의식은 우리가 회피하거나 억압한 것들을 반복적으로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통합으로 이끌기 위한 시도다."
즉, 같은 패턴의 연애를 반복한다는 건 -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다르게 해결하고 싶다'는 깊은 소망이 무의식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건 의식적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반복되며,
실패를 통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라는 신호로 볼 수 있다.
내 안에 각인된 아니마/아니무스 이미지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결국 비슷한 감정 패턴과 기대, 상처를 되풀이한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한 반복은 결과만 다르지 고통은 같다.
그만큼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2. 무의식은 ‘익숙한 고통’을 안전하게 느낀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하고 싶어하지만, 그만큼 '익숙함'에 대한 집착도 가지고 있다.
특히 어린 시절에 내면화된 감정은 고통스럽더라도 익숙하고 안전하게 느껴진다.
- 나를 무시하거나 통제하는 이성에게 끌리면서도
- 동시에 그런 사람을 회피하지 못하고
- 매번 같은 감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건 일종의 감정적 자동반사처럼 작동한다.
3. 자기 자신을 바꾸기보다 '상황만' 바꾸려 하기 때문
사람은 실패를 겪으면 보통 “다음엔 다른 사람 만나야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관계에서 반복되는 건 상대의 유형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의식의 반응 패턴이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도,
내 무의식에 각인된 아니마/아니무스의 이미지가 바뀌지 않는 이상
내가 사랑하고 실망하고 분노하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나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반복은 계속된다.
4. 의식은 잊어도 무의식은 잊지 않는다
내가 사랑을 실패했을 때, 의식은 “다신 안 그래야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의식은 그 감정의 패턴을 그대로 저장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무의식은 그 패턴을 다시 꺼내서
"이번엔 다르게 해볼래?” 하고 또 다시 시험을 시작한다.
그래서 무의식이 반복하는 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성장으로 가기 위한 시도이자 심리적 통합의 여정인 것이다.
무의식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가린다
사랑에 실패했을 때, 무의식은 ‘자기 혐오’라는 붕괴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래서 무의식은 실패의 원인을 '외부(상대)' 탓으로 돌리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의 교류가 아니라,
내 안의 무의식, 특히 억눌린 감정과 그림자를 흔드는 사건이다.
아니마/아니무스는 그 자체로 무의식의 투영이며,
그들이 발동되면 내 안의 결핍, 상처, 두려움, 이상화된 기대가 함께 움직인다.
무의식은 자기 이미지 붕괴를 막기 위해 상대방 탓을 하게 만든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결론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이 이상했던 거야”
“처음엔 나한테 잘하다가, 변한 거잖아”
이는 자기존재를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반응이다.
방어기제 중에서는 투사(projection), 부정(denial), 합리화(rationalization) 같은 것들이 여기에 작용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도 느낀다.
“그래도 나만 잘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나 같은 사람이 뭘…”
이건 무의식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자기 부정 이미지(나는 부족하다, 사랑받지 못한다)가
‘사랑의 실패’를 기회로 튀어나온 것이다.
- 무의식은 외부로 돌리며 자신을 보호하려 하고,
- 동시에 내면의 상처가 크면 자기혐오로 스스로를 찌르기도 한다.
- 그래서 사랑이 끝나면,
- "그 사람도 잘못했지만, 결국 내가 더 문제야.." 와 같은
- 복합적인 감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 무의식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가리기도 하고,
- 동시에 억눌린 상처를 기회로 삼아 튀어나오기도 한다.
- 이 두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 사랑이 실패했을 때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함께 나타날 수 있다.
투사는 ‘사랑’의 언어로 다가오기에 회수가 어렵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투사는 대개 사랑이나 열망, 혹은 집착의 형태로 다가온다.
즉, 이 투사는 “이건 내 거야”, “이 사람은 나와 깊이 연결된 사람이야”라는 주관적 진실로 작용한다.
그래서 이 투사를 거둔다는 건
- 내 사랑의 진정성을 부정해야 하고,
- 내가 경험한 감정의 깊이를 의심해야 하고,
- 애초에 끌림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건 감정적으로 감당하기 너무 고통스럽다.
그래서 투사의 회수는 '용기 있는 작업'이다
"투사를 회수하는 것은 내면의 그림자를 마주보는 일이며,
그것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언제나 성장으로 이어진다."
이 말처럼, 투사의 회수는 단순히 “내가 잘못 봤구나”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왜 그런 이미지를 만들었는가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 감정의 기원을 수용하며,
내 안에 통합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지만, 가장 의미 있는 통과의례다.
내면 통합이 되지 않으면 사랑은 나를 흔든다
융은 사랑이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의 통로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식의 그림자와 상처, 원형이 드러나는 강력한 순간이기도 하다.
사랑은 내 안의 깊은 상처를 드러낸다.
그 상처가 의식화되고 통합되지 않으면, 그 감정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내면이 통합되지 않은 채 만나는 사랑은,
결국 감정의 고저를 반복하며 자기비난, 고독, 두려움으로 연결될 수 있다.
사랑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의 관계를 비추는 가장 솔직한 거울이다.
진짜 사랑은 자기 통합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우리의 그림자를 불러내고, 그림자는 우리의 성장을 요구한다."
우리가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싶다면,
먼저 내가 사랑했던 사람 안에 어떤 나의 무의식이 숨어 있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 나는 왜 그 사람에게 끌렸는가?
- 내가 덧씌운 환상은 무엇이었는가?
- 그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상처가 남았는가?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내가 원하는 건 누군가의 사랑이 아니라, 내 내면의 통합이었다는 사실을.
사랑은 왜 중요한가 : 상처를 드러내는 유일한 통로
사랑은 단지 기쁨과 안정감을 주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내 무의식의 가장 깊은 그림자와 상처, 바람, 결핍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거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두려워하며,
어떤 사람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는가.
그 모든 감정은 결국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무엇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나를 성장시킨다.
나의 무의식을 의식화할 수 있게 하고, 상처를 마주하게 하고, 통합하게 한다.
진짜 사랑은 '상대'와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 '나'와 더 깊게 연결되는 과정이다.
어떻게 나에게 맞는 이성 이미지로 '다시 심을 수' 있을까?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이미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자각할수록 그 이미지도 진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과거의 아니마/아니무스를 직면하라 : 무의식의 뿌리 찾기
- 내가 반복해서 끌리는 사람의 특징을 써보자
- 그 특징이 누구에게서 왔는지(부모, 첫사랑, 상처 등) 탐색해보자
- 내가 끌렸던 이성들의 공통점 적기
(예: 냉정함, 자기 주장 강함, 감정 표현 부족 등) - 그 이미지가 누구와 닮았는지 떠올려보기
(예: 아버지, 어머니, 초등학교 선생님, 첫사랑)
➡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 것이 맞긴 했지만, 그것은 나의 ‘내면의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경험이었다”는 자각을 도와줌.
2. 내가 만든 이성 이미지에 현실을 맞추려 하지 않았는가?
- 과거 연애에서 “이 사람이 언젠가는 바뀔 거야”라고 기대한 장면 적어보기
- 상대가 한 행동이 아닌, 내가 그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써보기
➡ 투사가 어떻게 ‘희망’이나 ‘환상’으로 강화되는지 자각하게 됨.
2. 나의 현재 성향을 관찰하라
- 지금의 나는 어떤 감정과 삶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 과거의 무의식적 이미지가 지금의 나에게 어울리는가?
3. 새로운 이상상을 '의식적으로' 그려보자
- 더 이상 '구원자'가 아닌, 나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모습인가?
- 내가 나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지금 나는 어떤 관계를 원하는가?
- 내가 정말 원하는 관계의 감정 상태 적기
(예: 안정감, 평등함, 상호 이해, 정서적 연결 등) - 그 감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의 구체적인 태도 상상해보기
(예: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 듣는 자세가 있는 사람 등)
➡ 이 단계는 ‘감정 중심의 이상형 재설계’ 작업
4. 익숙한 감정과 건강한 감정을 구분하는 연습
- 상대의 행동이 나에게 익숙한지, 좋은 감정인지 둘로 나누어보기
- “익숙하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는 말을 일상에 적용하기
➡ 고통스럽지만 친숙한 관계를 다시 선택하지 않기 위한 실천 훈련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무의식의 틀에 끌려다니지 않고,
의식적으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아니마/아니무스 통합의 길이며, 진짜 사랑의 시작점이다.
"사랑은 선택이지만, 무의식 속 이미지는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의식화하는 순간부터,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더 이상 과거의 상처나 익숙한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지금의 나와 어울리는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내 안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다시 바라볼 시간이다.
내가 상처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더 나를 알고,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
진짜 사랑은
'누가 나를 더 사랑해주는가'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지금, 내 안의 사랑을 다시 들여다볼 시간이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찾도록 돕기 위한 신의 도구다.”
“투사를 회수하지 않는 한,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도 없다.”
“사랑의 반복은 단지 습관이 아니라,
내 무의식이 보내는 ‘이번에는 제대로 마주하라’는 요청일지도 모른다.”
“무의식은 우리가 회피하거나 억압한 것들을 반복적으로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통합으로 이끌기 위한 시도다.”
– C.G. Jung
2025.06.22 - [심리학 공부/칼 구스타프 융] -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4) : 다시 시작하는 연애 심리학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4) : 다시 시작하는 연애 심리학
2025.06.21 - [심리학 공부/칼 구스타프 융] -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3) : 사랑이 상처가 되는 이유, 투사된 사랑에 무너지는 나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3) : 사랑이 상처가 되는 이유
awelcomerain.tistory.com
'심리학 공부 > 칼 구스타프 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융 심리학으로 보는 예술가의 무의식 : 사랑이 아닌 예술로 드러나는 아니마, 아니무스 (5) | 2025.06.23 |
---|---|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4) : 다시 시작하는 연애 심리학 (5) | 2025.06.22 |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2) : 반복되는 연애의 심리 구조, 이별 후에도 같은 연애를 반복하는 당신에게 (3) | 2025.06.20 |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1) : 내 안의 이성성, 그 심리적 의미 (6) | 2025.06.18 |
아이는 부모의 감정 상처를 비춘다 : 융 심리학으로 읽는 부모의 콤플렉스와 치유의 심리학 (3) | 2025.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