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공부/칼 구스타프 융

융 심리학으로 보는 예술가의 무의식 : 사랑이 아닌 예술로 드러나는 아니마, 아니무스

awelcomerain 2025. 6. 2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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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8 - [심리학 공부/칼 구스타프 융] -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1) : 내 안의 이성성, 그 심리적 의미

 

융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1) : 내 안의 이성성, 그 심리적 의미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강하게 끌리거나,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이 드는 경우가 있다.분명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했고,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는데도마음 깊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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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무의식,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형상
: 융 심리학으로 보는 예술 창작과 무의식의 작용.

“처음 보는 그림인데 왠지 마음이 아릿하고,
읽어본 적 없는 소설인데 마치 오래전 꿈처럼 낯익은 느낌.”

그건 단지 작가의 기교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작품 속엔, 그들 자신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무의식의 또 다른 나’,
그러니까 융이 말한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가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어떤 예술은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사랑 같고,
이별을 그리지 않아도 가슴이 저민다.
그건 예술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온 이미지들이
형상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신비로운 존재,
이성의 얼굴을 한 무의식의 자아 —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리고 그들이 예술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목차
1. 이성의 이미지, 그러나 꼭 이성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2. 예술 속에 깃든 아니마·아니무스의 형상화
3. 아니마가 예술에서 나타나는 방식
4. 아니무스가 상징으로 드러나는 구조
5. 이성으로 발현되지 않고, 인격으로 드러나는 경우
6. 관객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


 

 

1. 이성의 이미지, 그러나 꼭 이성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예술가의 무의식을 형상화하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기본적으로 이성에 대한 무의식적 이미지이다.
남성은 자신의 무의식 안에 여성상을 지니고 있고,
여성은 그 반대로 무의식 속에 남성상을 지니고 있다.
융은 이 이미지가 주로 ‘사랑의 대상’으로 투사되며,
우리를 알 수 없는 끌림이나 깊은 연애 감정으로 이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상의 이미지는 반드시 실제 이성에게로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예술가에게 있어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사랑이나 연애로 향하는 에너지를 넘어
작품으로 전이되고, 형상화되며, 창작의 근원적 이미지로 자리 잡기도 한다.

예술가는 종종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 환상, 장면들을 떠올린다.
그 이미지들은 선명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지만 강렬한 의미를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가
꿈, 상징, 상상력의 언어를 빌려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순간이다.

작품 속에서 그들은 여인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은 숲, 달빛 아래의 강물, 고요한 바람,
불현듯 나타나는 구름, 검은 새, 기하학적 구조물의 모습으로도 출현한다.
그것은 곧, 예술가의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가
‘이성’이 아닌 ‘형상’으로 예술 작품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순간이다.

이처럼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예술가의 내면 깊은 무의식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향하지 않고도 예술의 언어로 말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작품이 관객에게 다가올 때, 이상하게도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울림을 느낀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상징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익숙함이 가슴을 건드린다.

그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가진 힘이다.
그것은 단지 ‘이상형’이 아니라, 예술로 표현될 수 있는 무의식의 또 다른 나인 것이다.

 

2. 예술 속에 깃든 아니마·아니무스의 형상화


예술가의 작품은 종종 무의식 속 이성상에 대한 투사로부터 출발한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노래했고, 밀레가 어머니 같은 여인을 그렸으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쓸쓸한 매력의 여인을 등장시키는 것처럼.
이들은 모두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를 외부의 인물에 투사하고, 그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이 단지 '이성에 대한 그리움'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은 더 깊다.
그것은 이성상이 더 이상 바깥으로 투사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인격 속으로 흡수된 경우이다.
이때 예술가는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외부의 모델로 삼기보다는,
내면에서 그것과 대화하며 새로운 자아를 구축한다.

그 결과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서,
자기(self)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형상들로 나타난다.

여신, 검은 새, 달빛 아래의 물, 흐르는 머리카락, 기하학적 구조, 강물 같은 언어들 속에,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작가와 하나가 되어 존재한다.

예술가가 창작하는 대상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아니마/아니무스를 담고 있을 수 있다.

(1) 이성의 이미지로 투사

  • 작가가 사랑하는 여성(또는 남성)을 작품 속 인물로 이상화할 때
      무의식의 아니마/아니무스를 투사한 것.
  • 단테의 베아트리체, 고흐의 여성 초상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이상화된 여성 캐릭터 등.

(2) 상징적 형상화

  • 직접적인 이성 캐릭터가 아닌, 풍경, 조형, 추상적 개념, 이미지로 표현될 때.
  • 아니마는 종종 자연, 바다, 달, 꽃, 여신 등으로 표현됨.
  • 아니무스는 빛, 언어, 구조, 탑, 기사, 신 등으로 상징됨.

(3) 자기 인격의 일부로 통합

  • 창작 과정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를 점차 의식화하며 자기(self)를 확장하게 됨.
  • 이때 아니마/아니무스는 단지 이미지가 아니라, 예술가의 인격 그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가 됨.
  • 이런 경우 작품에는 투사라기보다는 통합된 인격의 목소리나 색채가 배어 있음.

 

 

3. 아니마가 예술에서 나타나는 방식


아니마는 남성의 무의식 속에 깃든 여성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술가에게 아니마는 종종 영감의 원천,
혹은 자신을 창조의 세계로 이끄는 중재자로 작용한다.
그림자 속에서 피어나는 꽃, 꿈처럼 펼쳐지는 풍경,
형언할 수 없는 향기를 머금은 장면 속에 아니마는 존재한다.

그녀는 때로 슬픔으로 말하고, 때로는 말 없는 침묵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작가는 그 조용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든다.

 

 

4. 아니무스가 상징으로 드러나는 구조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에 자리한 남성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역시 단순한 ‘남성의 형상’이 아니다.

아니무스는 흔히 , , 기둥, , 하늘, 처럼 구조적이고 수직적인 상징으로 표현된다.
여성 예술가에게 있어서 아니무스는 내면의 논리성, 비판적 시각, 창조적 질서의 형상이다.

어떤 이는 아니무스를 통해 언어적 정교함과 서사의 틀을 구성하고,
어떤 이는 구조화된 시각 이미지로 자기 안의 논리적 세계를 형상화한다.

아니무스는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적 권위로도,
그 억압을 넘어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게 해주는 ‘내면의 스승’으로도 등장할 수 있다.

 

 

5. 이성으로 발현되지 않고, 인격으로 드러나는 경우


아니마·아니무스는 꼭 이성적 관계를 통해 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숙한 인격일수록,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안의 이성성과의 화해로 나타난다.

예술가는 이 화해를 통해 보다 전체적인 자아를 형성하며,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그들의 개성화(individuation)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작품은 종종 인간 존재의 양면성, 남성과 여성,
혼돈과 질서, 감성과 이성의 긴장 속에서 탄생한다.
그 형상은 상징적이고, 감정적으로 풍부하며, 해석될 수 없을 만큼 다의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모호함 속에서 진실이 깃든다.

  • 예술가가 어떤 특정한 이성에게 사랑을 투사하지 않고,
    내면화된 아니마/아니무스와의 대화를 통해 작품을 창조할 때.
  • 이 과정은 융이 말한 개성화 과정(individuation)의 일부이다.
  • 즉, 무의식 속 이성상을 외부에 투사하지 않고내면에서 인격의 일부로 받아들인 상태.
  • 프리다 칼로: 고통과 분열된 자아, 남성성과 여성성의 결합을 자화상으로 그림.
  • 카프카: 여성성에 대한 불안과 거리를 통해 자기 내부의 아니마와 갈등을 서사로 형상화.
  • 빌헬름 라이히: 에너지와 성적 억압의 개념을 통해 아니마적 상징을 이론화.

* 카미유 클로델 (Camille Claudel)

: 조각 속에 드러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교차

카미유 클로델의 조각 작품은 종종 고통, 분리, 결합, 감정의 격류를 보여준다.
특히 대표작인 《성숙한 나이(L'âge mûr)》에서는 그녀 자신의 상처,
그리고 로댕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무의식적 아니마·아니무스의 충돌이 드러난다.
작품 속에서 여인은 간절히 손을 뻗지만, 남성은 무심히 등을 돌리고 있다.
그는 그녀의 아니무스이자, 동시에 떠나는 아버지상이기도 하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y)

: 영화 속 아니마의 정화적 이미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는 자주 이해할 수 없는 여성 이미지가 등장한다.
《희생(Offret)》이나 《노스탈지아》에서의 여성은
단지 주인공의 연인이 아니라, 그를 구원하거나 경고하는 존재이다.
그녀들은 이상적이며 동시에 불가해하고,
주인공을 더 깊은 자기 자신으로 이끄는 ‘심볼’로 기능한다.
이는 전형적인 아니마의 영적·정화적 역할이다.

*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 아니마와의 긴장으로 구성된 서사 구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테레자와 사비나는
남성 주인공 토마시에게 각각 전형적 아니마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테레자는 감정, 육체적 결합, 정서적 동화를 요구하며 아니마의 수용적 측면을 나타내고,
사비나는 자유와 분리를 통해 아니마의 그림자적 측면을 드러낸다.
둘 다 여성 인물이지만, 사실은 한 남성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아니마 분열을 상징한다.

* 에곤 실레 (Egon Schiele)

몸과 에로스를 통한 아니마의 왜곡된 형상화

에곤 실레는 자화상과 여성 누드 속에서
자기 내면의 욕망, 죄책감, 불안, 애정 등의 혼재된 아니마 이미지를 표현했다.
그의 그림 속 여성은 성적이면서도 고독하고, 때로는 사라질 듯한 존재로 등장한다.
이는 이상화된 아니마가 아니라, 아직 통합되지 않은 미성숙한 아니마의 발현이다.

* 히가시노 게이고 (東野圭吾)

: 논리적 아니무스와 감성적 아니마가 교차하는 구성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속 여성 탐정(예: 유가와 교수나 카가 형사와 대응되는 인물)은
논리적, 구조적, 설명적인 남성적 태도(아니무스)와 대조되는
직관적, 감정적, 연결지향적인 아니마적 태도를 나타낸다.
두 요소는 항상 충돌하거나 협력하며 이야기를 이끈다.
이 역시 무의식의 상보적 에너지가 작품 구성에 작용한 예라 볼 수 있다.

* 이상 (시인)

: 환상의 아니마를 언어로 소환한 경우

한국 시인 이상의 시 세계에는 실제 여성에 기반한 사랑시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 이미지로 등장하는 여인상이 많다.

시 「거울」이나 「이런 시」 속에 등장하는 여성적 이미지는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개념으로 환원된 아니마의 파편들이다.

이상이 그린 여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언어의 환각, 자기 해체의 환영이다.
그의 아니마는 현실의 여성이 아니라 언어와 무의식의 경계에서 살아 움직이는 환영으로 드러난다.


 

6. 관객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는 종종 이유 없이 울컥하거나, 한 장면에서 오래 눈을 떼지 못하곤 한다.
그 이유는 작품 속 형상화된 아니마·아니무스가 우리 자신의 무의식과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아니마가 화폭 속에 피어났을 때, 그것은 곧 우리의 무의식 속에도 흔들림을 일으킨다.
보는 이도 모르게 감정이 흔들리고, 자신 안의 잊혔던 이미지들과 마주하게 된다.

예술은 그렇게, 하나의 이미지가 두 사람의 무의식을 연결하는
은밀하고 신비로운 통로가 된다


예술가는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미지를 끌어올린다.
그 이미지들이 이성의 형상일 수도, 상징의 형태일 수도,
심지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의 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곧 그들 안에 살고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임을 인식할 때,
예술은 단순한 표현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기와의 대화이며, 삶의 본질에 다가가는 형상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
그 목소리는 흔히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형상과 감정을 통해 말한다.
그것이 그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이다.”

“모든 창조적인 사람은 자신의 무의식에서 오는 내면의 여성,
아니마와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녀는 영감과 상상의 원천이다.”

“아니마는 예술가의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이미지이며,
그는 그것을 외부 세계에 투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 C.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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